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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5년 여름






친구들에게,

먼저, 나의 소중한 너희들에게 아버님 별세소식을 제데로 알리지 못한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갑자기 온 일이기도 했지만, 시카고에서 차로 4시간 떨어진 곳에서 이틀만에 장례식을 치루면서, 
아직도 수없이 많고 멀리 흩어져 계시는 아버님 친지, 동료,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다보니 
상주의 친구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엉뚱한 미숙한 생각으로 회장에게 연락처도 알리지 않았다.  
영옥이 신덕이 애나가 하루 아침 소식에 보낸 화환을 장례식장에서 보면서 나의 이 커다란 실수를 뒤늦게 깨닳았다.

아버님 소천에 위로, 격려, 안부를 보내준 모든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내게 희안한, 동키호테같은 사람이 있었고, 이제 떠나셨기에 
그분을 생각하며 자랑스런 아쉬운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린다.   

아버님은 고려시대 이규보 조상의 24대 후손으로 충북 영동에서 1926년에 태어나셨다.
두살에 글을 읽으시고 세살에 편지를 쓰셨다는 신동으로, 
목포에서 사업하시는 외삼춘과 영동에 지주이셨던 아버님의 재산을 모두들여 
바올린, 피아노, 아이스 학키등 다양한 교육을 받으셨다.

해방직후 고등학교에서 배운 영어로 충청도 미군 지사 통역사로 시작하셔서, 
몇년 후 이승만 대통령 연설 집필자로,
나이 20 중반에 하늘이 주신 재능으로 제 1 공화국의 의무를 받은 하나의 일꾼이 되셨다.

자유당 말기에 비밀 당원이 되어야한다는 압력을 거부하시고 집에서 쉬고 계실때 4.19가 일어나 
허정 임시정부 대통령 공보 비서실장을 하셨고,
윤보선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보국장 자리는 한 1,000,000원이 아니겠냐 하기에 다시 낙시터에서 쉬고 계실때 
윤보선 대통령 기자회견이 억망이되자 다시 공보부로 데례갔고,
5.16후 각하께서 미 정부와 의사소통이 안되자 총든 군사들을 보내 
최고회의 공보 비서실장으로 붙잡혀가 미국이 요구하는 민간 선거를 준비하셨다. 
각하께서 군복을 벗으시고 제 3 공화국을 시작하시면서 공보 비서실장 자리를 제의했으나, 
험악한 그곳이 당신이 계실곳이 아니라 생각하시고
그의 나이 38에 다시 공부를 시작해 Fullbright 장학생으로 2년만에 Syracuse대학에서 신문학 박사학위를 마치셨다.
귀국 강연회에서 언론의 자유/보호등 쓸떼없는 소리만하는, 이제 각하에게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이 사람에게
월남전쟁 문제로 불란서와 유럽에 여론을 수습하라 1 년만 빠리에 나가 있으라 보내시더니, 5 년이 지나고
국내 본사취임없이 미국 공보관장으로 발령되신것이 1970년.
귀양살이 10년 정부가 유신 독재체제로 접어들면서 그 일꾼은 1973년 조국의 국적을 버리게 되었다. 

그때 나이 47, 젊은 세대를 키우는 교수의 새로운 사명을 반갑게 받으셨으며,
조국의 인권 복귀와 민주화를 위하여, 외로운길에 올라 꾸준히 걸어 오셨다.
미 하원 국회에 증언자로, 미국 미디아를 통해 한국 독재, 인권 탄압문제들을 폭로하시며,
조국 민주화를 위하여 재미 한인 민주회를 만드시고 외국으로 떠도는 반독재 정치사회인들에게 도움을 드렸다.
경제적 이득도, 벼슬도, 명예도 그 한점의 이유가 아니셨고
조국을 사랑하기에, 주어진 과제를 영광으로 생각하시고, 그 과제에 충실함에 만족하셨다.

이번 장례를 치루면서  지난 32 년 조용한 시골에서 보내신 후생(?)이 
옛날의 화려찬란한 시절과 다름없는 삶이었다는것을 
먼길을 찾아온, 아버지보다 훨씬 젊은 민주화 동려들, 이 시골에서 지나친 수없는 옛 제자들, 
아버님의 오랜 친지들의 말씀 속에서 새삼 알게되었다.

태어나서 이제 눈을 감으신 오늘까지 수 없이 지나친 사람들에게서 아버님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깊고 좋은 인상을 주셨는지 난 미처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것이 그의 외모도 아니었고, 그의 재능도 아니었고, 그의 사회 위치도 아니었고
어느 누구에게나 정중하고, 어느 일이나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는, 
조용히 끊임없이 불타는 정의의 사랑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마음이 항상 젊으셨고, 오늘에 일에 바쁘셨고, 내일을 계획하시며,
사회의 정의가 당연하다는 단순한 이상을 따라오면서, 
부끄럼없는 삶이 즐거운것이지 어려운것이 아니라는것을
내게 이래라 저래라 말씀 없이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희안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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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이 가장 좋아하시던 성경구절을 밑에 담았다.

고린도전서 13장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