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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친구들에게, (2005년 5월 모국 방문기)

Suitcase를 싣고 인천을 향하는 길에 서울을 지나치며 웬지 쓸쓸했다.  
열 일곱 청춘에 기꺼이 떠났던 고향.  그 어느날 내 마음속 깊이 머물러
버린, 이제 아랑곳없이 변해버린 고향. 미련도 흘러간 세월속에 무미해
졌고 나의 현실과 아무 상관이 없어져버린 고향. 현실로 돌아가는 
한나절 비행기에 앉아 인사말을 쓰려하니쓸떼없는 눈물이 왜 흐르는지.
기나긴 시간, 머나먼 거리, 오랜 침묵을 용서하고 지난 열흘 한 순간도 
쉬지않고 반겨준 옛 친구들에게 보내는 인사말은, 내 문장으로는 표현 
할 수없는, 내 마음속에서 사라질수없는, 끊임없는 고마움이야.
지난 18일 시카고 대한항공 ticket counter에 여권과 비행표를 제출
하면서 보이지 않는 옛 친구의 따듯한 손길을 벌써 느꼇지. 아시는 분이 
있냐 묻더니 일반 좌석을 옆자리가 빈 두 자리로 옮겨주고 Lounge 
Pass와 짐까지 특별 "signature"표를 붙혀준것이 해연이였겠지?
인천에 도착하자 숙소, 일정, 핸드폰까지 완벽하게 준비하신 우리 
회장. 내 평생 무슨 좋은 일을 했다고 이런 친구를 일찍 만났는지.  
옛날 명기 어머님께 수없이 받았던 저녁상을 생각하면서, 우진
어머니의 정성스런 저녁식사후 대한민국 같지 않은 Tower Palace 
Guest Room에 짐을 풀었다.
금요일 오후, 미국으로 출장가시는 김선영 박사님을 만나러 다시 
인천에 도착하니 혹시 내가 대전 내려가기 무리일까 명은이 까지 
데리고 함께 올라온 대전 아씨를 36년만에 만났지. 카페에 구면인 
우리 넷은 전혀 어색함 없이 반가운 또 아쉬운 점심시간을 함께하였다. 
김 박사님은 우리가 알고있는 겸손하시고, 진실하신 의사선생님, 
교수님, 아버지, 그리고 남편. 영실이는 카페에 심통꾼 답지않게 
우아한 여인.  그녀의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치 공상에 찬 어느 
소녀를 보고있는듯 내가 한동안 착각 했었지.  영실이의 말투에 그 
귀여운 재치가 담겨있어서.  
영실아, 새벽에도 쉬지 못하고 아침일찍 인천까지 고마웠어. 명은아,  
처음엔 반갑게 만났는데 아빠와 쓸데없는 의사이야기를 시작해 
지루했지? 네 엄마 아빠가 처음 너를 안은 그날부터 오늘까지 사랑
으로 이루어진 너를 만날 수 있었다는것이 내게 진실과 사랑이 무엇
인가 다시 알려주기에, 내가 하는 일에 또 나의 남은 삶에 힘이 된단다.
사진으로만 보아온 이 미연화백의 작품을 실제로 보고자 남은 오후를 
부천에서. 새로이 시작한 삶이 정리가 아직 안되있었기도 했지만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았는지 그림 두 세장 볼 사이없이 시간이 흘러버렸지.  
미연아, 고독과 갈망을 채워줄수 있는, 아니 달래줄수 있는것은 작업 
뿐인지도 몰라. 특히 예술가에게.  보내준 책자 천천히 공부할것이고, 
새로운 출발에 축복이 어김없이 계속되리라 믿는다.
주머니에 몃푼없던 중학시절엔 학교에서 광화문까지 걸으며 이야기 
하였지만 이날 저녁은 의식이와 석기하고 "무등산"에서 편안히.  
고 3의 특권으로 밤 1시에 집에 온다는 예슬(의식이 딸)이가 조금 일찍 
들어와 아직 태평이라는 중1 지원군과 간식을 나누고 서울에서의 
첫날을 매듭지었지. 아참, 혜숙아, 걱정 그만해, 의식이, 과분한 사람과 
결혼 잘 했어.

토요일 아침 교복입은 아이들 틈으로 정문에 들어섰을때 35년동안 
별로 변하지 않은 모교가 반갑게 보였다.  계단을 올라 서무실앞을지나 
둘러보면서 3층 뒷길로. . . 이대후문 오르막길에서 대강당의 모습이 
보이자 갑자기 무엇인지 가슴에서 목으로 밀려오기에 발 걸음을 
멈추고 내가 벌써 이러면 안되는데 하였지.
대강당 앞뜰에서 영실이와 혜숙이가 이름표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다정한 눈길에 이미 나는 옛 정에 흠뻑 젖었지.  어떻게 무슨 말로 
인사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세월에 쌓인 반가움이었어지만 엊 그제 
헤어진듯 서로 말이 필요 없었다.  I thought to myself what beautiful 
women they were.  Really, I did.  영실이 같은 우아한 걸음이 없듯이 
혜숙이 입술의 매력도 찾기 힘든것이지.  이런 혼수 상태에서 석훈이 
덕택에 깨어낫지. 석훈이는 멋있는 중년의 신사.  사업도 잘 되고 가정도 
화목한것이 그의 여유있는 미소에, 너그러운 마음에, 탄탄한 몸집에 
보이는듯 하였다. 천천히 마지막 계단을 오르며 나타난 여인은 기대에 
어긋남 없는 Fashion 그 자체. Two-piece Navy suite에 정확히 맞는 
몸매, 조용히 대조를 이루는 blouse에 matching handbag, 마지막 
액센트는 꽃잎 Broach.  누구?  성경희여사.
대머리에 그나마 남은 머리카락도 허연 나를 1 회선배나 옛 선생이라 
생각했는지 친절한 학생이 안내한 좌석은 제일 앞 두번째 전 교장
선생님들 바로 뒤.  찬송가 78장 "참 아름다워라"가 대강당을 울리며 
시작된 예배, 지난 50년 사, 중고 합창반 까마득한 후배들의 축가,  
그 때와 오늘의 영상, 그리고 교가 합창은 나의 마음을 완전히 그 옛날로 
돌려보냈다.  내게 보이는 지휘자는 김순세, 교목은 정진홍, 교장은 
박정례, 내 바로 옆에는 손수건으로 눈을 가린 혜숙이.  
천국이 따로 있지않아.
동문들을 위한 오찬에서 선배 후배 선생님들께 인사드릴 기회도 
좋았고, 역시 여동창들이 음식 음료수 챙겨주어서 편했는데, 전 
교장선생님들의 말씀은 이상하게 변명처럼 들렸어.  한 10명 
되었는데, 뽑기, 평균화, 입시주의의 영향으로 대부분 우리가 왜 
부중고의 전통을 귀하게 여기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라 느껴질 정도로. . 
좀 부족했어.  동문으로는 2 분에게 마이크를 드렸는데, 다행히 1회, 
세연이 오빠, 홍세준 선배께서 짧지만, 이상적인 창립정신을 실천
하였던 초기 선생님들 처럼 개성과 창의력, 또 긍지를 가진 건전한
사회인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 지금도 이루어질수 있도록 
사범대학/부중고에게 중요한 과제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지.

모교 뒷뜰 사진전시회에 우리 카페에서 가져간 사진이 꽤 많았어.  
기전이 성자 순행이가 소풍 낙엽위에 앉아있는 사진을 보면서 참가
하지못한 니들 생각도 잠깐 했다.  경호 동생 경덕이가 마침 그곳에 
있기에 생각없이 언니대신 나하고 사진찍자 하는 바람에 한동안 
손수건이 필요했었어.  사진을 자세히 보면 눈물이 고여있지.  
경호도 이렇게 이쁘게 50을 맞았을텐데.
아침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던 친구들이 하나 둘 2학년 3반 교실에 
모이고, 광도와 성룡이가 도착하자 교정으로 내려가 반가운 친구들, 
선후배, 선생님들과 인사가 끝이없었고, 석란에서 예약시간 늦게 
모여 저녁을 시작했지, 성은이, 낙숙이, 성옥이, 미재, 미연이, 종인이, 
의식이, 수영이, 원섭이, 진이, 석기, 철희, 설희,,형휘, 경진이, 혜정, 
은석, 진숙(이과, 과부반의 한을 모르는 얘들은 끼리 모인다더라). 
조남숙, 한함윤, 김창진, 정수룡, 전숙자, 최길자, 이병희, 그리고 몸이 
불편하신 박선택 선생님도 잠깐이지만 아드님과 며누리의 부측으로 
먼 길을 오셨었다. 우리를 사랑해 주신 선생님들도 그 시절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고, 한함윤 선생님은 교육자로서 더 따뜻한 정과 
정성으로 열의와 성의로 학생들을 보살필 수 있지않았을까 말씀
하셨다.  이런 선생님들께서 모였던 부중고의 교육 이상과 그 실천이 
절때 우연이 아니었어.
재연이가 지가 빠졌다 불평일테니, 걔는 오찬에 나타나서 카페선전을 
언론인 답게 잘했고, 우리가 수다에 바뻐 열심히 도와준 음학회에 
안간다고 보채더니, 2차, 3차 가면서 실력 발휘했다.  경옥이는 
선약으로 오후에 사라졌고. 
2차는 그 동내 술집에서 석기가 쏘았는데, 나하고 수영이는 성은이 
옆에앉아 술 따르는 기생이었고 말 한마디 할 기회도 없었다.  3차는 
신촌 로타리 어느 노래방에서.  여기서도 난 한참 촌 놈이었지.  
성은이의 끊임없는 막춤, 경희의 세련된 스텝은 자리가 너무 좁았고, 
재연이 노래는 풍부한 감정으로 잘 하는데 생전 들어보지 못한 
레파토리.  성옥이는 너무 다정하고 챙겨주고 손은 따듯하고, 어깨는 
부드럽게 보들보들 하더라.  그 이상은 난 몰라. 종인이는 근처에도 
못 갔으니 더 모르고. 쪼고맞고 엉성하던 애가 (중학교때 얘기다) 
매력있는 여인으로 나타낫다고는 보고할 수 있다.  철희가 완전히 
나가 떨어진 명기와 나를 도복동까지 운전해주어서 집에도착하니 
새벽 4시. 
이렇게 기다렸던 토요일이 지나버렸다.   
.
.
.               


일요일 아침엔 시차 때문이었는지 일찍 깨어서 서울 온지 3일만에 
장안동 고모님댁에 전철로 도착하였다.  전철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그안에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낙이 있어.  Tower Palace보다 좀 
다른 조국이 보이니까.  하긴 그 사람들에게도 양복입고 초록색 
베낭을 멘 내가 이상한 구경꺼릴수도 있지만.  오늘은 푹 쉬고 교회, 
집안일 하라 했건만 명기는 벌써 여러번 내가 오늘 뭘하는지 걱정인듯 
전화. 동창희가 끝난것을 아시는 고모님이 누가 제일 잘되었냐 
물으셨을때 난 한동안 생각을 했어야 했다.  "고모, 저희들은 그런 
얘기 않해요.  장관이나 장관부인된 친구도 없지만 제 각기 가지가지 
일들에 열심이 잘 삶니다."  이 대답을 드리고 난 새삼 친구들이 
자랑스레 느껴졌어. 우린 옛이야기에, 살던이야기에, 이제 사는 
이야기에 바빠선지 출세한 이야기는 별로 끼지 못하는 편이지.  
정말 너무 편한 친구들이야.
저녁은 경진이 가족과 13회 이종욱부부와 강남에서.  종욱이는 
나처럼 고등학교를 타교로 진학했었는데 혹시 내가 선배로서 바람치 
않은 영향을 주지 않았나 미안히 생각했었고, 또 잘 알던 부국 
후배이기도하여 이번 서울 방문에 미리 연락했었다.  경진이와는 
오랜 연락이 있었지만 딸 유미를 그날 처음 만났고 결혼직후 정말 
아무것도 없이 미국 생활에 도전했던 엄마 아빠 이야기 들려주었지.  
유미가 미국에서 자라나 여러가지 어려운 문화 차이, 자기 나름데로의 
연예인으로 성숙하고싶은 마음과 계약된 회사가 바라는 역활에서오는 
초조한 갈등, 예쁘고 똑똑하고 2 언어에 능숙하니 무슨 걱정이겠냐만 
청춘이 누구에게도 쉬운 것은 아니지.

월요일 Plaza Hotel 전철입구로 나오니 날씨는 화창하였다. 검으스레한 
시청 빼고는 낮선곳 같았고 또 앞 광장이 기억보다 작게 느껴졌어.  
예약이 있느냐 묻던이 Plaza Hotel 중국 음식점이 두사람이 점심할 
자리가 없고, 얼마 기다려야 한다는 말도 없었는것을 보면 신동오목사와 
내가 고객으로는 마땅치 않았던게지? 소공동 골목에서 옛 물만두가 
생각나기에 조그마한 중국집에 자리잡고 신목사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즈음 과격한 기독교인들이 종교 도덕을 이용하며 
이끌어가는 미국 정책이나, 그들의 잠재적인 비상한 수법등 우려되는 
점을 말씀드린것인데 나 자신이 주님의 뜻에서 멀어졌다 오해하신것같아.  
난 대부분 전쟁이 경제적 이유로 발생하지 어떤 도덕 윤리 원리문제로 
일어난다 생각하지 않아.  이제 세계 규모의 대기업들이 각종 기업 
뿐만이 아니라 신문 방송 출판 기업들을 가지고 있기에 propaganda가 
아주 세련되어있지.  이라크 전쟁을 선과 악의 대결로(Axis of Evil), 
부시의 정책을 따르지 안으면 terrorist라는 ("You are either with me 
or you are with terrorists") 어쳐구니 없는 논리가 먹혀들어가는것도 
신문 방송사들이 대기업안에 죽어버린 때문이라 생각해.  점점 
커져만가는 대기업 독점형태를 어떻게 방지하고 분산하느냐가 힘든 
과제가 아닐까?  신목사님과의 작별은 우리 대화와 너무 안, 아냐, 잘 
어울리는 고속 터미날 전철에서.
그날 저녁은 고정이 덕택에 사업인들에게 익숙한 접대를 받았다.  
그런 접대에 사진 찍기는 너무 촌스러울것같아 디카도 베낭도 없이 
갔었으니 그곳에 같이 있었던 모든 분들 안심하시기 바람.  친구도 좋고 
노래도 좋았고 술도 좋았는데, 은경아,(미국에서 한 번 신세진 구면이고 
동창은 동창이니 서로 말을 놓기로 지난 인사 전화때 결정 하였음) 너무 
늦게까지 과음한것 두번 합해서 미안하다. 네가 의리있는 순진하게 
착한 남편을 둔 죄 아니겠니. 

화요일 아침 영실이와 데이트를 한다는 설레임 때문이었는지 생각
했던것보다 몸 콘디션이 좋았다. KTX 열차에서 잠깐 눈을 붙이려
하는데 벌써 대전. 어려서 6시간 가던 급행열차, 10년전 2시간에 
도착하던 새마을호가 신기했는데, 이제는 50분. "명은이네 집"에서 
명은이 친구들과 돌봐주시는 선생님들께 인사드리고 영실이와 
단장한 한식집으로. 한국 음식문화가 지난 30 여년 너무 발전하여서 
난 메뉴를 보아도 뭐가뭔지 모르지만 영실이가 알아서 골라주어 정말 
맛있게 한식을 즐겼다.  
우리들의 카페가 내게 왜 소중하냐 누가 묻는다면 난 오늘의 있음직
하지않았던 만남의 이야기를 할꺼야. 영실이 소식을 오래전에 명기가 
보내준 동창회 사진을 보면서 들었을때 대전에서 장애가 심한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겠구나 하고 지나쳤었지. 인연이래야 어린 중학 3년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것, 조용하지만 예쁜아이였으니 기억에 있을 
뿐이었지.  그 철없이 행복했었을 젊은 어느날, 하늘이 주신 어려운, 
한때 원망스러웠을 과제를 사랑과 믿음으로 이끌어온 아름다운 여인의 
이야기를 우리 카페가 없었다면 나는 몰랐을꺼야.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 
하여도 이렇게 귀엽고 재치있는 우아한 아씨가 내가 찾아볼수있는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
경희에게 고맙다는 인사하기전에, 먼저 나의 부모님이 30여년 그리던 
조국에 편안히 3년이나 계실수있게 여건을 마련해주신 경희 아버님과 
광주대학교에 늦은 감사 드린다.  경희는 내가 하고싶은데 못하는 
것들을 완벽히 소화하는 친구야. 노래, 춤, 여행, 사회봉사.  경옥이 
말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화가 이루어진 여유있는 멋쟁이.  늦은 
연락도 마다하고 대전까지 배웅해준 정성, 뺨에 입마춤만으로는 보답이 
안되니 곧 다른 기회가 오겠지. 
이날 저녁은 다시 석란에서 국민학교 이숙례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그날 도착한 득기와, 볼때마다 내 마음을 설레이는 영순이. . .등 
국민학교 동창들과 함께.
.
.
.               


경옥이가 토요일 동창회에서 다시 보자는 예정도 없이 일찍 가버려 
걱정이었는데 수요일 혜숙이와 창덕궁에 가자는 반가운 연락을 받고 
안심이 되었었다. 서울에 도착한지 6일이 벌써 지낫건만 고모님과 2 
사촌동생들과는 점심 한번, 30여년 뒤늦은 데이트에 또 나가는것이 
죄송스러운 아침인데 다시 울리는 핸드폰.
오후에는 집안 일로 창덕궁에 함께 갈수없으나 아침 차 한잔은 
어떻겠냐는 귀여운 목소리. 안국동 나가는길에  강남으로 잠깐 들렸지.  
종업원들이 아마 내가 딸하고 차 한잔한다 생각했었을꺼야.  걔가 너무 
젊고 얄밉게 예뻐서. 중학 어느날 박정례 교장선생님이 충정로에살던 
얘와 북아현동 나를 데리고 우리집 근처에 사시는 김애마 학장님댁에 
갔었던 이야기등 옛 정에 흠뻑 졌어드는 3-40분 동안 울리고 다시 
울리는 핸드폰. 내가 할일없이 천장만 쳐다보고있는지 걱정하는 명기, 
의식이, 재연이.
뜨거운 커피 한잔의 씁슬 달콤한 여운과 아랑곳없이 달리는 전철.
지나버린 세월이 조금 원망스러울 때가 있어.

안국역 3호구로 나오라는 정확한 지시를 따르니 정다운 그모습. 
경옥이야 94년 처음 서울을 찾았을때부터 웬지 가깝게 느껴지는, 
사실 몇번 아니지만 마주 않을때마다 헤어지는것이 내게 정말 
아쉬운 사람이야. 중 1학년 1반의 추억이 뚜렷해선가, 어떤 이야기든 
진지하게 들어주는듯한 눈길 때문인가, 똑똑한, 똑바른, 가식없는 
소녀가 내게 아직도 보이기 때문인가?
혜숙이는 어릴때 소꼽장난 이후에 내게는 인색한듯 느껴졌던 소녀, 
96년 부국 졸업 30년 동창회 핑게로 간신히 불러내어도 말 몇마디 
할, 쳐다볼 기회도 안 주고 동창기념사진 찍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무정한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는 드디어. 내가 어린 그날부터 어김없이 
알고있던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씨의, 이제 부끄러움을 조금 
벗어난. . . 정말 다시 마음에 들었고 쏠렸어.
안국동 골목은 이제 모두 도로 포장이 되어그런지 깨끗하고 단정하고 
아기자기한 아직 낭만이 남아있는 곳이야. 몰라, 두 아리따운 
아씨들과의 산책이라 그렇게 느껴졌는지. 복귀된 창덕궁은 우리가 
소풍갔었던 그때 모습이 여기저기 있는듯 하면서도 고요하고 청명한, 
일제시대, 태평양, 남북 전쟁의 고통을 이제 견뎌낸듯 평화롭지만 또 
잊혀진듯 쓸쓸해 보였어. 
그날 저녁 약속시간까지 채워주고 장소까지 챙겨준 이 소중한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이런 만남이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는. . .
내가 멀리 사는것이 다행이야,
for, I did fall in love all over again.

그날 저녁은 전숙자 교수님이 한턱 내시겠다 하셔서 중국 출장에서 
돌아온 상훈이와, 지난 토요일 선약으로 잠깐 동창회에 들렸던 일범이, 
의식이, 재연이와 경복궁 앞 "비나리"에서. 상훈이는 털털한, 옆에있기 
아주 편한, 말도 재미있게하는 사업인이고, 몸이 편치 않고 일에 
밀렸으면서 두번이나 나와준 일범이는 젊잖은 겸손한 신사. 앞으로 
치료를 더 받아야 한다는 불안은 지울 수 없지만 장기적 효과가 좋은 
방법이 남아있으니 의사로서 예지는 안심된다.
재연이는 기억 못했지만, 중학교때 정학이냐 퇴학이냐 교무회의에 
올랐을때 전선생님이 재연이 아버님을 만나시고 그당시의 사건 
마무리를 책임지신 이야기도 들었다. 저녁은 옛이야기 바쁜 사이에 
일범이가 지불했고, 2차 와인은 옛날 선생님에게 구원받은 재연이가.
.
.
.               

목요일은 30여년 소홀히한 선산으로.  그래도 종손이라고 영동역에서 
반겨주시는 집안 어르신들께 죄송스러울 뿐이고 여든이 넘으신 산지기 
할아버지가 이제 숲이 깊이 우거진 산길을 안내 못하시니 희미한 옛 
기억을 믿고 같이 내려간 외사촌 동생과 집안 아저씨와 산에 올랐다.
세월과 소홀함에 부식한 무덤, 비석들. 할아버지 할머님 앞에 인사
들이면서 여기까지 찾아올 사람이 이제 나 뿐인데. . .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메루로 직접 갈아 만든다는 순두부 집에서 아버지 할아버지 옛이야기를 
들으며 식사를 끝내고 다시 영동역으로 향할때, 조용하던 핸드폰이 
다시 발동. 그날 저녁은 고모님과 사촌동생들과 보내려 했지만 
석훈이의 정성으로 "번개팅"이란 새로운 단어를 배웠지.
서울역에 내려 시간이 있기에 종로에서 일하는 사촌동생도 볼겸 
서울시내를 걸었다. 낫설은 고층건물에 가려선지, 아니면 어렷을 때 
멀게 느껴졌던 길이어서 그런지 갑자기 나타나는 남대문, 이순신동상, 
광화문 지하 4거리등 눈에 익은 장소가 마치 영화 "Planet of the Apes"
끝에 "Statue of Liberty"가 보이는 장면처럼, 이곳이 확실히 맞는 
고향이구나 생각했다.


명동 세종호텔 앞에서 기다리는 석훈이, 역시 두번째 만나니 더 반갑고 
좋았어  사진들을 봐서 알겠지만 어느 모임에나 성옥이와 성은이는 꼭 
있어야하는 멤버야. 젊잖은 진이 원섭이 홍석이 모두 그 활기에 
휩쌓이고. 원섭아, 성은이 빼놓고, 철희, 설희, 너, 나, 우리 유치원이 
노는것을 제데로 안가르친것 같다. 철희나 설희의 다정한 미소는 말이 
없어도 내 마음을 따듯하게, 아마 조용한 시간이 있었으면 들을 이야기도 
많았을꺼야. 홍석이는 어렷을때보다 알맞게 살이 붙어서 더 잘 생겼고, 
얘기도 재미있게 잘해. 허장로, 의식이등 조용했던 애들이 동대문 
경찰서에 구속되었을때 박정례 교장선생님이 가셔서 석방해주신 
이야기등 모르던 사연들을 들었지. 내가 전혀 모르는 재연이 레파토리를 
들은날이 이 번개팅.  동문 골프대회 준비로 지난 토요일 2차/3차에 
재연이가 빠졌던것을 잠깐 잊었었다.

이제 금요일.  재연이가 오라는 KBS에도 미연이와의 수다로 못갔고, 
재연이 부부와 저녁도 월요일 선약으로 안되었고, 자기 집에서 한잠 
자야한다는 성의도 받을 기회가 없었다. 바쁜 직장일 틈에도 챙겨주고 
승렬이와 금요일 점심을 마련한 재연아, 정말 고마웠어.기회있을 때 
승렬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해주기 바란다.  
내가 전혀 모르는 여의도(비행장이었으니까) skyline 을 내려보는 
"화단"에서 얼굴은 옛모습이지만 세련된, 여유있는 승렬이와 반갑게 
일식을 끝내고 형휘와 종로로 나왔다. 저녁 약속시간까지 한국 가요 
CD 와 책 몇권을 찾을까 했는데 이어지고 이어지는 형휘와의 대화는 
세상을 보는 각도가 나와 비슷하다 느껴져서 그랬는지 끝이 없었다.
형휘야, 예의치않은 즐거운 시간이었고 이 글들과 올리는 노래들이 
담겨있는 너의 선물 CD 잘 듣고있다.

마지막 만남은 8회 선배 김근식 부부와 성은이.  어린 내게 각별히 
사랑을 베풀어주신, 깊은 신앙으로, 자신이 경제적으로 힘들었으면서도 
고아원 봉사일을 열심히 하시던 진실한 선배님이시지.  2년전 연락이 
되어  이번 서울 방문에 꼭 뵙고싶은 분이었다. 선배하고 항상 다니던 
성은이도 기억하시기에 자리를 같이했지. 기대했던 그대로 성실하신 
모습, 인자하게 느껴지는 부인. 집에 가는길이 장안동 쪽이라고 버스를 
함께타고 밤 시내길을 숙대 앞에서 남대문, 을지로, 동대문, 이제 알아볼 
수 없이 변한 답십리를 지나 장안동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토요일 아침 의식이 차에 짐을 싣고 
지난 열흘 끊임없이 나를 즐겁게 하였던 명기 딸 혜진이의 핸드폰을 끄고,
이 착각의 세계를 떠나는 인천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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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내게 1969년 이대부중은 
어리석었지만 순수했던, 
혼동과 갈등으로 괴로웠어도 이상으로 가득 찾던, 
다시 돌아갈수 없어도 떠날수 없었던, 
마음 깊은곳에 새겨진, 
내 영혼이 쉬어가는 곳이었어.
지난 열흘 추억의 오솔길을 걸으며
함께 걸어준 친구들이 어제의 사람뿐만이 아니고 
오늘의 숨결이 느껴지는 사랑하는 사람들임을 알게되었지.
옛날의 그리움도, 지나간 아쉬움도, 
이젠 오늘의 사랑으로 계속되는 설레임.
나의 영혼의 소중한 동반자들에게 보답할수 있는길은
오직 사랑이야
진정 진정한 사랑이야.
2005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