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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시, 가사, 번역

[스크랩] 옛 추석사진을 보다 문뜩 이 시가 생각나서


정님이
	이시영 (만월 1976)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들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어 주더니 
왜 가 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 밤이 오면 하이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 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당잘그당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 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출처 : 이대부고 12회 동창회
    글쓴이 : 이유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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