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빠리 이야기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만든 Orsay Museum
이곳은 관객들에게 밀려와 가까이도 이 그림을 볼 수 없었다만 효남이 말대로 인사삼 들려야하는 곳이어서
모네가 살았던 빠리에서 한두시간 떨아진 Giverny 집과 정원. 명희와 미연이 추천으로 Mont Sainte Michel가는 길에 들렸었다.
호텔을 이 섬 안에 잡고 저녁에 도착해 식사후 노을녁도 보고 관광객이 떠난 후라 조용하고 신비로운 곳이었는데. . .
아침에 일어나니 장이 선듯이 아무도 없었던 길목이 이렇게 변했단다
이곳은 빠리로 돌아오는 길에 들린 Chartres 성당. 마리아의 베일이 전시되어있는데 진짜라고 믿는 수 밖에
베르사이유. . . 불란서 왕국의 처참한 종말이 이곳에서. . .
마리 안투아네트 의 농가 장난감 집과 동내
풍부하지 못했던 20세기 중반에 많이 힘들었던 조그만 극동 반도에 태어나
LIFE 잡지에 펼처졌던 화려한 바깥과 우주를 동경하며 어린시절을 보내고
먹고살기 험한 세상 발붙히기에 서성거리던 날들이 어제 같은데 벌써 오늘이다.
서양예술문화의 중심지 빠리는 그 소문 그대로
12세기에 벌써 인구가 제일 많은 서양의 중심지였다는데
도시계획을 이토록 여유있게 고적과 오늘의 일상생활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해 놓았는지,
세월을 초월한 국민과 국가의 문화에 대한 정성에 감탄할 뿐이다.
불란서 혁명 비극 잿덤이에서 살아남은 것이 오늘의 민주공화국 체제라 생각할 때
200년 전 그들의 희생과 투쟁이 우리의 삶과 얽혀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제 환갑이 넘어 찾아본 낭만의 빠리에서
옛 친구와 지난 날의 그러나 서로 새로운 이야기들. . .
언어도 부족하고 생계를 이어갈 아무 준비도 없이 하고싶은 영화공부를 하겠다 도전한 이 친구의 용기는,
부모님 밑에서 언어가 별로 필요없는 과학과 수학을 공부한 나와는 차원이 다르지.
45년전 여름 새파랗게 젊었던 그 때, 속리산에서 한나절을 함께한 선배님들과의 반가운 만남,
그 때 두분은 대학생으로 미팅에서 만난 연인, 두분이 결혼하시고
대한민국 경제 개발과 해외 진출에 개척자로 빠리에 자리를 잡으시면서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잠재의식에서 살아온 지난 3-40년,
젊은시절에 모르는 척 했던 “타향살이” 들을 때마다 그놈에 가사가 너무 슬프다 하며 함께 원망도 했다.
우리는 떠났던 그 옛날 서울에 집착했고
서울은 아랑곳 없이 우리를 떠났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방인이 되었다는 공감.
기대 이상에 빠리
반가운 옛 친구와 선배님들
그 이상 뭘 더 바랫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