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스크랩] 이대부중에 감사하는 내마음

이 유진 2009. 9. 14. 08:31
이 편지는 지난 봄에 New Jersey Princeton에계신 이종숙선생님 (우리 중2때 다시 이화대학에 가신 국문학 선생님 이라 아마 기억 하는지?)께 보낸것인데, 서툴게나마, 모교에 감사하는 나의 마음을 동창들과 함께 하고자 이 까페에 보낸다.

이종숙 선생님께,

지난달 주신 전화 감사합니다. 오랜세월이 지났고 선생님께 직접 학습을 받아본 일도 없었으면서도 중학 신입생인 저에게 주신 다정하고 친절한 선생님의 손길이 지금도 따듯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1970년 고2 여름에 이곳에와 의대를 끝내고 일반외과 전공으로 1987년 부터 Chicago 바깥에 자리를 잡아 가정을 시작해 지금 중1의 은식 (Alissa), 국민학교 4학년의 진이 (Anne-Marie), 1학년의 규식 (Austin) 이를 제처 Maureen과 함께 키우고 있읍니다.

저의 부모님은 1973년 유신이후 Western Illinois University 신문학 교수로 계시다 2001년에 은퇴하시었고, 지난 2년은 광주대학 초청교수로 계시다 올여름에 이곳으로 다시돌아오십니다. 두분이 건강하셔서 40년 가까이 그리던 조국을 여유있게 방문하시게 되었읍니다.

아버님도 몃년이리라 생각하시고 서울을 떠난것이 1963년. 어머님도 1년 이겟지하고 떠나신것이 1965년. 단순한 공무원으로서 조국에 하고프신 일들이 너무 많으셨던 아버님께 그 기회없이 이곳에서 가버린 세월, 저와 저의 가족들에게는 결국 순탄한 자라남 이었읍니다만, 저는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갑자기 며칠 학교를 안가도 된다하여 철없이 좋아했던 1961년 5월 !6일이 사람들에 인생을 이렇게 바꾸어 놓으리라곤 미처 몰랐었지요.

저는 중3을 시작하면서 별 이유없이 점점 학교생활이 즐겁지 않았읍니다. 학교생활이 잘되는듯 하면서도 집에가는 길에 저자신이 너무 부족하고 부끄럽고 견딜수 없이 저자신이 싫었읍니다. 결국 UN Day후 외국에계신 부모님에 허락을 받고 이대부고 진학을 하지않았지요. 그때는 왜 탈출이 필요했는가도 몰랐고, 그것이 아마도 사춘기에 좌절감이 아니었나 먼 훗날 깨닭게 되었읍니다.

유치원부터 이화에서 보낸 10년, 그후 바깥에서 방황하면서 저는 이화에서 받은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는지를 알수 있었읍니다. 이대부중을 나와 서울에서 1년반 받은 교육은 연탄을 찍어내듯 틀에밖아 색갈도 모양도 같은 학생들을 생산하는 공장이었읍니다. 교문에 선 생활부와 교사들은 가방과 주머니를 검색하고, 주먹과 협박으로 그들에위치를 유지했읍니다. 지각을 했다고 옷을 벗기고 운동장을 뛰게하고, 머리가 길다고 가위로 머리를 밀어부치고, 그들은 교과서와 회차리로 열심히 가르쳐 시험 평균점수와 등수로 경쟁 서열사회에 크게 이바지 했읍니다만, 믿음, 사랑, 존중이 없는 헛된 가르침이었읍니다. 치열한 경쟁속에 명문과 권력이 필요한 서울은 부패 할수밖에 없지요. 서로를 믿지못하고 남을 이겨야 성공한다는 자기만이 중요한 서울에 풍토가 잘못된 반세기의 교육이지 절대로 민족성이 아니라고 저는 믿읍니다.

이대부중고의 특별한 분위기는 남들이 이해할수 없는 비결이지요. 이름표도 학년 Badge도 없이 저희들은 잠깐사이에 전교에 선후배와 선생님들을 누가누구인지 알고 지냈읍니다. 교무실에 오가는것이 두려운일이 아니었고, 쓸때없는 사춘기의 고민을 들어주시고 이해해주신 선배, 선생님들이 계셨읍니다. 기독교 교훈을 가르치시면서 강요하지 않으셨고 저희들의 의견을 항상 들어주신 정진홍 선생님, 문법 한마디도 않하시고 되풀이 회화 영어를 가르처주신 정수룡 선생님을 이곳에 나와있는 동문들은 뒤늦게 감사하고 있읍니다. 인수분해의 요령은 이제 다 잊어 버렸지만 UN Day행사를 준비하느라 모여한 의논, 계획, 응원기조작, 연습, 친구와에 다툼, 시기, , , ,, 그속에서 저희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도웁는 사회인의 기초를 배우고 있었읍니다.

30년이 지난 오늘 저희 동창들이 서로 반갑게 찾고 만나는것도 단순히 동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저희들에게는 서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치관과, 사랑과, 그리움이 있기때문입니다. 대부분 한국 명문동창회에는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누구누구가 어떻게 출세를 했고 왕년에 얼마나 대단한 Elite였음을 서로 재확신 하기에 즐거운 모임이고, 저희들에 만남은 오랜 세월동안 각자 제 나름대로 이끌어온 생활을 정답게 나눕고 즐거웠던 추억에 빠질수있는 행복 이지요.

누님같은 최길자선생님과 가끔 연락 하면서 최선생님께서 우리 민족은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 하셨읍니다. 그 정은 선생님들께서 오래전에 매일 베풀어 주신것이기 때문에 삼사십년 지난 오늘도 그 정에 따뜻함과 감사를 느끼고 있읍니다. 선생님께서 계속 새 세대의 학생들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소식을 저의 국민학교 동창 Michigan의 강용진을 통해 들었읍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제가 New York에 갈 일이있을때 꼭 연락드리고 찾아뵙고 싶읍니다. 지난 33년을 한글없이 살다보니 원래 고2 실력에서도 한참 떨어진 서투른 한글이 되어버렸읍니다. 마춤법도 자신이 없는 제가 국문학 전문가에게 이렇게 쓰는 용기를 이해해 주시고 용서해 주십시요. 감사합니다.

2003, 5, 26

이유진 올림

메모 :